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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월25일.월-07월29일.금)
창11장10절-12장16절
말씀묵상보기=
노아의 후손 중 셈의 계열에서 아르박삿 ->셀라 -> 에벨 벨렉->르우 -> 스룩 ->나 홀 ->데라 -> 아브람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사로 한 가문에서 준비시키셨다.
이에 대홍수가 끝난 지 2년, 노아의 계보는 이러하다. 맏아들 셈은 100세에 아르박삿을 낳고 600세에 죽었다.
또한 아르박삿은 35세에 셀라를 낳고 438세에 죽었다.
그리고 셀라는 30세에 에벨을 낳고 433세에 죽었으며. 에벨은 34세에 벨 렉을 낳고 464세에 죽었다.
이에 벨 렉은 30세에 르우를 낳고 239세에 죽었다. 르우는 32세에 스룩을 낳고 239세에 죽었다.
또한 스룩은 30세에 나홀을 낳고 230세에 죽고. 나흘은 29세에 데라를 낳고 148세에 죽었다.
이때를 즈음하여 사람들의 수명이 짧아진다. 롯의 아버지인 하란은 우르에서 일찍 죽었고,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205세에 하란에서 죽었다.
이미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에서 영광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는데, 그 떠나는 움직임을 주도한 사람은 아버지 데라이지 아브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셈의 자손 중에도 우상을 섬긴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이다. 데라는 문명의 도시인 갈대아 우르에서 달우상을 섬 겼던 인물이다.
창조의 족속의 머리는 아담이었지만 부르심받은 족속의 머리는 아브라함이다.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세상을 심판하셨지만
그를 부르심받은 자의 조상이 되게 하지는 않으셨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실 때 분명한 기점을 갖고 시작하신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새로운 족속의 조상이 되도록 부르셨다. 즉 믿음의 조상이다.
그를 처음 부르신 것은 갈대아 우르에서인데, 이것은 여기 창:12장에는 기록되지 않고 사도행전 7장에 기록되었다(2-3절). 12장 1절-3절은 하란에서의 두 번째 부르심으로 볼 수 있다.
왜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셨을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복을 내리고… 이는 축복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했다. 믿음이 있는 자는 아브라함과 같이 복을 받는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이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믿음이다(히 11:6).
그러므로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다. 그의 나이 75세 때부터이다. 누구든지 아브람처럼 일생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따른 자들은 축복의 근원이 될 수 있다.
그는 처음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아버지를 떠나지 못했고, 조카 롯도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떠나기는 떠났지만 주도적인 것은 오히려 아버지 데라였고 또 애비가 없는 불쌍한 조카 롯을 차마 떼어놓지 못했다.
그렇게 모두 함께 고향을 떠났다. 그는 순종했는가? 그렇다. 그러면 완전했는가? 그렇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브람의 귀한 점은 한 발 한발 완전을 향하여 배우며 순종하며 버리며 따랐다는 것이다.
그는 75세가 되어 가나안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아버지는 하란에서 죽었고,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세겜으로, 벧엘로 나아가다 먼저는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거기서 더 나아가 벧엘로 올라가야 했다. 이에 아브람은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쳤다. 아이는 무더기라는 뜻이고,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가나안에 머물다 기근이 임하자 애굽으로 내려 갔다. 그러나 가나안은 우상을 가진 민족이라 그들은 우상을 많이 섬겼다
이에 아브람의 여정은 우르에서 하란을 거처 가나안까지 약 1.500km나 되는 거리를 다녀야 했다
정말 놀라는 일이다 아마 교통수단은 낙타였을 거라 추측이 된다.
그는 함부로 거주지를 옮겨서는 안 되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이다.
이에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가라 하셨기에 그 땅을 귀히 여겨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람은 자기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사래를 누이라고 속이는 결과를 범했다.
그로 인해 바로에게 사래를 빼앗기는 큰 위기를 만나지만,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친히 해결해 주셨다.
한편 바로가 모든 원인을 알고 아내를 내어주고.아브람은 많은 재산을 얻게 되였다.(창11장10절-12장16절)
이에 아브람은 이 위기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깊이 체험한다.
마음에 새김=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부르셔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으로 인도하신다.
아브람의 믿음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아브람에게 어떤 자격이 있어서 그를 부르신 것 같지는 않다.
결국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은혜'라고 부른다.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다.
내가 뛰어나서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서 믿은 것이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는 하나님이 인도해 주셨기에 가능했다.
혹시 연약한 자신을 보며 실망하고 있는가? 결코 좌
절하지 말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주님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아브람이 익숙하고 풍요로운 갈대아인의 우르를 뒤로 한 채 미지의 세계를 향해 순종한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믿음은 희생이 따르는 결단을 요구하기도 한다. 귀하고 값진 것일수록 치러야 할 대가도 큰 법이다.
오늘 주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결단은 무엇인가? 특별히 그것이 죄와 관련된 것이라면 신속히 순종하는 것이 복된 걸음의 시작이라 생각된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어려움을 만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늘말씀처럼 견디기 힘든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또 어려운 일들이 겹쳐서 올 때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고비를 넘을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잘못한 일지만 아브람은 사래로 인해 많은 재산을 얻기까지 했다.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게 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시련을 두려워하지 말자. 시련은 그것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깨닫게 만든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시련은 무엇인가? 그 시련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것을 기대해 보자.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말씀과 함께 승리하게 하소서.아멘 (기독교대한감리회 온양온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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