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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

간음한 여인의 묵상

예수가 답이다. 2023. 6. 12. 07:42

롬11) 2023-0612(월) / 김재현 목사

[말씀의 현장]롬2:17-24
유대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바울의 안타까움이 하나님의 마음처럼 기록된다. 바울은 복음이요 사랑을 전하고 싶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으로 인하여 복음의 길이 순탄하지 않다. 특히 유대그리스도인들의 일부가 그렇다.

오히려 그들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 받는다. 돌이켜야 한다. 스스로 선생될 수 있다는 교만을 내려놔야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랑일 수 있고, 선한 것을 분간하는 지혜가 있으며, 연약한 인생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 스스로의 우월성을 깨뜨려야 한다.

[나의 반응]
선교지에서 살았을 때 기록했던 묵상이 생각난다.
요 8장의 간음한 여인에 대한 묵상이었다
(2010.10.19. 우크라이나에서)

- 중략 -

성경은 이러한 현상이 터득된 자기의 기술이 아니라 애초부터 사람 속에 내제된 욕망의 본성이라고 가르친다.

다른 말로는 이것을 정죄의식이라고 하는데 정죄의식은 자기 속에 강하게 존재하는 죄의 표현이자 육의 표현이며, 필경은 이로써 또 다른 죄를 낳게 되고, 그 마지막은 사망을 향하는 증거가 된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향하여 "다시는 죄를 짓지말라!"고 하셨다. 그 여인이 행한 일이 죄라는 것을 인정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녀가 죄인인 것을 보았고, 그녀를 향한 마음의 돌과 입술의 돌과 사망의 돌을 손에 들었다.

그들은 예수님 속에 있는 '정죄하지 않는 진리'를 보지 못했고 그분 속에 있는 '생명의 본성'을 깨닫지 못했으니 하나님을 안다하면서도 정죄와 사망의 본성에 갇혀 있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복음을 가지는 목적은 정죄가 아니다. 숫한 말씀의 지식을 빗대어 남을 판단하는 시선을 가지려 함이 아니고, 논리적인 사고로 옳고 그름의 냉철한 기술을 가지려 함도 아니며, 정의로운 칼날과 지혜로운 명철 같아 보이는 시선을 갈기 위함도 아니요,

내 속의 정한 기준을 자랑하여 남보다 높아짐을 소유하려함도 아니다. 이로써 얻어지는 것은 모두 무익한 것이니 오직 사람의 썩을 호의만 얻을 뿐이다.

-중략-

돌이켜보면 나는 지극히 간음한 여인이었다. 주 앞에와 사람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불쌍한 존재였다. 이전에 벌써 정죄의 돌멩이로 심판을 받았어야 할 처참한 인생이었다.

하지만 주님을 만났으니 그분은 나에게 자유를 주셨고, 죄의 담을 허무셨으며,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감사한 일인가!

오! 사랑의 주님!~ 이런 내가 어찌 타인을 향해 돌을 들겠습니까? 차마 돌을 들라치면 내 몸을 치시고, 차마 정죄의 말을 할라치면 입술을 치소서!

그 보응으로 다시금 내가 나의 나됨을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주님을 더더욱 사랑하게 하소서! 이것이 내 평생의 소망입니다.

[아버지의 마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주님과 동행하기]
율법의 눈은 타인을 사망의 활로 쏘지만, 복음은 나를 보게 합니다.

오늘의 삶이 주님과 동행하므로 십자가로 죄와 육신의 욕망을 처리하고 주님과 함께 말씀과 함께 성령 안에서 부활을 소망하는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어제 주신 주일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이제, 제가 구원받은 아버지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이라면 비판은 매우 위험한 일이며, 십자가는 매우 유용한 칭찬이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영의 일은 우리를 부활로 이끄는 놀라운 생명인 것을 깨닫고 기억하게 해주옵소서.

오늘은 병원 진료와 약속이 있습니다. 순간순간 주님과 동행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