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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답이다. 2023. 3. 25. 00:00

23년03월20일(월)-03월24일(금)

눅:23장1절-56절 깊이 보기
●23:1-5 당국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로마 총독에게 당신을 큰 반란범(“백성들에게 소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한 자.”)으로 고발한다. 예수님의 활동 전체를 걸어 세 가지로 고발한다.

이에 경제면에서(세금을 바치지 못하게 하고), 정치면에서(왕으로 자칭하고), 이념면에서(혁명적인 가르침을 주었다고) 고발을 한다.

그렇지만 빌라도는 예수께 죄가 없다고 선언한다.
  당국자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는 실제 이유가 하나같이 유대인 특권층을 불안하게 하는 것들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유대인 특권층이 정치와 경제면에서 백성을 억누르고 빼앗아 누리고 있던 특권을 당신 말씀과 활동으로 뒤흔들어 놓고 계셨다. 그들은 그 모든 불의한 짓을 종교의 탈을 씌워 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바로 그 점을 직접 공격하고 계셨다.

그들이 경제와 정치에서 저지르는 불의한 짓을 숨기기 위하여 종교를 이용하고 있음을 폭로하고 고발하셨다. 예수께서는 갈릴리와 유다와 예루살렘을 발칵 뒤집어놓으셨던 것이다.

●6-12 빌라도가 헤롯의 관할권을 존중하기로 함에 따라 빌라도와 헤롯 사이의 불화가 없어진다. 헤롯 앞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 되겠기에 침묵을 지키신다.

빌라도와 헤롯이 서로 미워하게 된 것은 빌라도가 갈릴리에서 저지른 학살 사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손을 잡는다.

권력자들이란 서로 이익이 맞아떨어지기만 하면 적이었다가도 언제라도 서로 합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권력 자체가 위태로울 때는 모든 권력자들은 기초부터 흔들리면서 서로 협력하게 되어 있다.

●13-25 헤롯이나 빌라도나 예수님 계획이 정치, 경제, 사회에 미칠 효과의 범위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23:4,14,15,22). 예수님의 종교적인 가르침은 유다 당국자들에게나 위험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다 당국자들은 예수께서 유명한 반란범인 바라바보다도 훨씬 위험인물임을 잘 알고 있다. 이에 예수께서는 로마 총독에게 ‘반란범’, ‘반역자’, ‘소요를 일으킨 폭도’로 고발당하신다.

그러나 군중은 유다 당국자들의 사주를 받아 예수님을 죽이고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청한다. 유다 당국자들은 예수께서 사회를 정치, 경제, 종교 등 모든 면에서 변혁을 일으키려 하신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불의한 유다 당국자들은 자유와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예수님과 당신 계획을 물리치기 위하여 군중에게 함성을 지르게 한다. 빌라도는 마침내 군중의 함성에 지고 만다. 예수님을 전적인 반란범으로 사형에 처하라고 명한다.

●26-32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의 참된 제자를 상징한다(참조. 눅 9:23). 예수께서는 끝까지 하나님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몸 바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아파할 일이 아니다.

예수님의 계획에 등을 돌린 데 따른 결과 앞에서 울어야 한다. 무죄하게 희생당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울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과 함께 두 죄수가 사형장으로 끌려가고 있다. 십자가형은 반란범에게만 내려지던 형벌이다. 이 두 사람도 예수님처럼 변혁을 열망했겠지만 예수님만큼 근본적인 변혁을 꾀하지는 못 했을 것이다.

●33-38 예수께서는 죄수들 가운데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 백성과 그들의 우두머리들과 병사들이 놀리는 가운데서 예수께서는 용서한다는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을 죽인 책임자들은 용서를 받는다. 자기네 행위의 심각성과 결과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죄명을 써 놓은 명패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살리는 왕권이 왔음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한다.

그러나 백성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무력하기 짝이 없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계획을 비웃는다.

모든 사람을 구한다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구하지 못한다고 비웃는다. 군인들도 지지 않고 욕설을 퍼붓는다. 이들은 자기들을 해방하여 주실 수 있는 분을 비웃는다.

예수께서는 왕이시지만 여느 왕과는 아주 다르다. 자기 지배권력을 지키려고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왕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살리려고 당신 생명을 바치는 왕이시다.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는 정의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는 예수님과 죄 없는 많은 사람의 피를 대가로 요구할 것이다.

●39-43 모든 것이 망했다 싶은 그 순간에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구원자로 보여주신다. 예수께서는 살아 계시는 동안 죄인들에게 구원을 선포하셨다.

이제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에게 구원을 주신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홀로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의한 사회가 단죄한 사람들,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

예수님과 당신 계획은 죄수들까지도 갈라놓는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웃는다.

예수님 방식의 변혁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반란범은 회개하고 예수님의 계획을 받아들인다. 정의와 자유와 생명은 지배하는 세력이나 권력에 의하여 실현될 수 없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44-49 세 번째 복음서의 정점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손에 당신 자신을 넘겨 드리는 행위다.

예수님의 죽음은 재력과 권력에 바탕을 둔 체제의 폭력을 불러일으키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억눌리는 사람들을 편드신 당신 생애와 활동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그 죽음은 또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당신께 순종한 결과다. 그밖에도 예수님의 죽음은 진실을 나타낸다.

백성은 뉘우치고 이방인 백인대장은 예수께서 죄가 없으심을 선포한다. 자기가 속해 있는 체제가 정의로운 사람들을 죽이는 사악한 체제임을 인정한다. 군중도 가슴을 치면서 뉘우친다.

예수님의 친지들과 여인들은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바라다볼 수 있는 곳에서 사태를 낱낱이 지켜본다. 이들이 앞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50-56 예수님의 주검은 무덤에 묻힌다. 분명히 역사는 끝난 것처럼 보였고, 예수님을 단죄하여 죽인 체제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인들은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

이에 생명의 어머니인 여인들은 무엇인가를 예감하는 것 같다. 예수께서 땅 속에서 쉬시는 동안 그 여인들의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을 단죄한 산헤드린의 의원이었지만 그 자신은 의회의 결정에 찬성한 일이 없다.오히려 그는 선량하고 의로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늙은 시므온과 같은 사람이다.
아멘

♤나의 머리(생각) 속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소망을 마음 판에 새기게 하소서.아멘

'말씀묵상'을 통해 '오직 주님'만의 영광 돌리며 나의 주권을 내려놓겠나이다.아멘